도다이지
동대사는 일본의 국가 진호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대불전은 1709년에 재건되어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로 자랑합니다. 그 본존인 여래신불(여래나부츠) 좌상은 친근한 '나라의 대불님'으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받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성무 천황의 보물을 소장한 정창원 정창 등 많은 귀중한 건축물과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남대문, 법화당, 종루, 개산당, 전해문, 본방경고, 정창원 정창, 이월당 등의 건물은 국宝으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보여줍니다. 동대사는 석존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대불님 아래에서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깊게 하였습니다.
기본 정보
- 관광지 이름
- 도다이지
- 위치
- 〒630-8587 나라시 자오시초 406-1
- Access
- JR나라역, 킨테츠나라역 시내순환버스 7분 "대불전・春日大社前" 하차 후 도보 5분
- 주차장
- 근처 주차장을 이용해 주세요.
● GS파크 동대사 서대문 주차장(유료) / 나라시 오시아게쵸 6-1 - 영업시간
- 【대불전】
4월~10월 개방 7:30 폐쇄 17:30
11월~3월 개방 8:00 폐쇄 17:00
【법화당(삼월당)・계단원천수당】
개방 8:30 폐쇄 16:00 - 정기 휴일
- 무휴
- 요금
- 성인(중학생~대학생 포함): 600엔
초등학생: 300엔 - 연락처
- 전화번호:0742-22-5511
- 공식 사이트
지도
상세 정보
▶동대사의 역사
동대사는 성무천황의 황태자 기신왕의 보제를 추구하기 위해 신구(神龜) 5년(728)에 세워진 산방(후의 금종산사)이 그 시작이 되었으며, 천평 13년(741)에 국분사 및 국분니사(금광명사, 법화사) 건립의 조서가 내려짐에 따라 이 금종산사가 승격되어 대와국 국분사(금광명사)로 발전하였다. 천평 15년(743)에 노사나 대불 조건(조립)의 조가 내려지고, 수도가 자각락(시가현 고카시 시가라키쿄)에서 평성으로 돌아오자, 대와국 금광명사에서 노사나 대불의 조상 공사가 시작되었고, 천평 21년(749)에는 불신이 주조되었다. 동시에 대불전의 건립도 진행되어, 천평 승보 4년(752)에 성대한 개안 공양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서탑과 동탑, 강당 및 삼면 승방 등이 동대사 사장의 손에 의해 건축되어 동대사로서의 일곱 채의 전각이 순차적으로 정비되었다.
동대사는 국분사로 세워졌기 때문에 천하 태평과 만민 풍락을 기원하는 도장이었으며, 동시에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고 학승을 양성하는 역할도 있었기에 화엄을 비롯한 나라 시대의 육종, 그리고 헤이안 시대의 천대와 진언 등이 포함된 각 연구소(종소)가 설치되어 팔종 겸학의 학문 사원이 되었다.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자, 제이곤 년(855)의 대지진으로 인해 떨어진 대불의 머리는 진여법 친왕에 의해 복구되었지만, 실화나 낙뢰 등으로 인해 강당이나 삼면 승방, 서탑 등이 소실되었고, 남대문과 대종루도 붕괴되었다. 더군다나 치승 4년(1180)에는 평중형의 군세에 의해 대불전과 전각의 대부분이 불 타버렸다. 하지만 이듬해에는 슌조봉 중원이 복원에 착수하였고, 문치 원년(1185)에는 후白河법황을 도사로 하여 대불의 개안 공양이 거행되었다. 이듬해 문치 2년에 수방국이 동대사 건립료소에 할당되면서 복구 사업이 착실히 진행되었고, 건규 6년(1195)에는 대불전의 입회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복구에 따라 침체되었던 교학 활동도 활성화되었고, 가마쿠라 시대에는 많은 학승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영록 10년(1567)에는 미요시와 마쓰나가의 난이 일어나 2월당 및 법화당, 남대문과 전해문, 정창원 및 종루 등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 모두 재가 되어버렸다. 마침 전쟁국 시대였기 때문에 동대사의 복구는 매우 어렵게 진행되었고, 대불의 불두도 동판으로 덮는 간단한 수리밖에 할 수 없었다. 결국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공경 상인이 여러 나라의 기원과 여러 다이묘의 협력을 막부에 간청하여 복구에 착수하게 되었고, 그 결과 대불의 개안 공양이 원릉 5년(1692)에, 그리고 대불전의 입회 공양이 보영 6년(1709)에 행해졌다. 이후 전각의 정비는 역대의 대관진직에 의해 이어졌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선 신불 분리령과 사찰령 몰수는 동대사의 존속에 위기를 초래하였으며, 종제상 화엄종을 명명하는 것과 같은 사찰 개혁을 강요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및 쇼와 시대의 대불전 대수리에 이어 여러 전각의 유지를 위해 노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대사는 그 역사로부터 소중한 문화유산을 여전히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2월당 수정회의를 비롯한 전통적인 불교 의식의 보물 창고이기도 하여 매년 일본 전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러 방문하고 있다.
▶나라 시대 창건 – 성무천황의 원망 –
정창원에 전해지는 성무천황의 유애의 품들은 천평 시대의 화려함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천황 치세 중의 정치・사회 정세는 결코 평온한 것이 아니었다. 긴야왕의 변에 상징되는 권력 투쟁, 광명황후의 형제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천연두의 유행, 규슈에서의 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반란과 10년이 넘는 격변이 계속되었다. 성무천황은 이러한 세상을 치유하고 국가의 안녕과 민중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불교 사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후지와라 히로쓰구가 반란을 일으킨 천평 12년(740) 이후, 천황은 평성궁을 떠나 몇 차례 도읍을 옮겼지만, 그 사이의 천평 13년(741), 궁니교에서 국분사 및 국분니사 건립의 조서를 내놨고, 천평 15년(743)에는 자각락 궁에서 노사나 대불 조명의 조서를 내셨다.
국분사의 경우는 『금광명최승왕경』과 『법화경』을, 대불 발원은 『화엄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 국분사의 정식 명칭인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에서 볼 수 있듯이, 한 국가 단위로 나라와 민중의 안녕을 기원하는 취지가 2년 후의 대불 조명의 경우에는 그 범위를 훨씬 초월하여 "동식함(모두) 번영하리라"는 화엄의 연융무애의 세상을 갈망하며, 대불 조립을 위해 "한 가지의 풀, 한 움큼의 흙으로 조각을 도와 조립하리라"는 사람들의 협력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천평 12년에 가와치의 지식사에 가서 노사나불을 참배한 이후, 천황은 화엄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게 되었고, 천평감보 원년(749)에는 공식적으로 『화엄경』을 근본으로 하겠다고 표명하였다.
한편, 천평 17년(745) 평성 궁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동대사의 전신인 금종산사의 사역에서 재개된 노사나 대불의 조립은 금광명사의 조각소, 후의 조동대사사에 의해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3년 8회에 걸친 주조를 통해 천평 승보 원년(749) 10월에 불신이 주조되었고, 이듬해에는 대불전도 건립되었으며, 동년 4월에는 성대한 개안 공양회가 거행되었다.
이 대 사업은 적극적인 민중의 힘을 결집했던 행기 보살 및 초대의 동대사 별당 량변 스님 등 많은 사람들의 협力이 있었기에 실현되었으며,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동대사는 성무천황・행기보살・량변 스님과 개안의 도사로서 수행한 바라문 스님 보제선나에 의해 "사성 설립의 사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마쿠라 재건 – 중원의 활동 –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자, 대불의 등 부분에 손상이 보이거나 기울어짐을 막기 위해 배후에 흙을 쌓는 등의 보수가行되었지만, 제이곤년(855) 대지진에 의해 머리가 떨어져 복구가 진행되었다.
한편, 대불전 및 여러 전각도 천재나 실화 등으로 인해 복구가 요구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업이나 사찰 본래의 교학 활동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이 시대에 농원이 운영되었지만,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동대사가 그 농원을 두고 다양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치승 4년(1180), 평중형의 병화로 인해 전각의 대다수가 재가 되었다.
동대사의 복구 조립에 큰 공적을 남긴 인물은 중원이 상였으며, 상인은 양와 원년(1181), 61세에 간진직에 임명된 이후, 후 백과 법황과 미나모토 노요리토모의 지원을 받으며 20여 년의 후반생을 복구 사업에 바쳤다.
먼저 송나라의 주조사 진화청의 협력을 받아 머리 부분과 왼손 등 대불을 보조 주조하고, 문치 원년(1185)에 개안 공양을 시행하였다. 이어서 대불전 재건을 위한 자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수방국과 비젠국이 동대사 건립료소에 배정된 이후부터는 건설이 급속히 진행되어 건규 6년(1195)에 입회 공양회가 거행되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대불전의 양옆에 시중 및 사천왕이 겨우 반 년 만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후 경내의 여러 전각이 차례로 재건되어 가마쿠라 시대의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에도 재흥 – 공경 상인의 활약 –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면서 동대사는 더 이상 예전의 기세가 없었으나, 이를 가속화한 사건은 영록 10년(1567)의 미요시와 마쓰나가의 병화였다. 대불전, 계단당, 정토당, 강선원, 사성방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대불은 야마다 미치안에 의해 보수되었고 임시 집도 지어졌으나, 곧 임시 집은 강풍에 쓰러져 100년 가까이 비바람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참혹한 모습을 보고 대불전 재건의 뜻을 품은 인물이 공경 상인이었으며, 정향 원년(1684) 에도 막부에 대불전 수리를 청원하여 허가를 받아 같은 3년부터 대불 주조에 착수, 불두와 연판 18매를 보조 주조하고 원릉 5년(1692)에 개안 공양이 거행되었다. 또한 동시에 대불전의 재건도 진행되었으나, 천평 및 가마쿠라 시대의 규모를 따르는 것은 당시의 경제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고, 현재 볼 수 있는 형태로 동서를 약 60%로 축소한 구성으로 재건되어 보영 6년(1709)에 입회 공양이 성대히 행해졌다. 그러나 중문과 회랑이 완공되기까지는 또다시 30년이 걸렸다.
▶메이지부터 현재까지
이 세계 최대 규모의 목조 건축물은 그 후 불타지 않고 메이지 시대를 맞았지만, 손상이 심해 처마는 보조 기둥으로 겨우 지탱되는 상태였고, 메이지 39년(1906)부터 해체 수리에 착수하여 내부에 철골을 사용하여 보강하는 등 새로운 공법을 병행하였고 메이지 45년(1912)에 완료되었다.
하지만 지붕 공사에 문제가 있었던 듯하여 가끔 전당 내에 빗물이 보이기 시작했고, 쇼와 48년(1973)부터 7년의 세월을 들여 대수리가 이루어져, 같은 55년(1980) 가을에 입회 법요가 성대히 거행되었다.